이제 완연한 봄볕이다. 5월이면 항상 떠오르는 것이 있다. 20여 년 전 국도 5호선 거제~마산 간 도로 설계를 위해 거제도에 현장조사 차 출장으로, 그 당시에는 교통편이 쉽지 않아 최소 1박2일 일정으로 가야 업무를 마칠 수 있었던 시절이다. 저녁 식사를 위해 들어선 식당에 그때는 생소한 ‘멍게비빔밥’이라는 메뉴가 보였다. 멍게는 생으로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 터에 멍게를 밥에 비벼 먹는다고?

나에게 멍게의 기억은 어머니 따라 동대문시장에 갔다 오는 길에 멍게·해삼이라고 쓴 허름한 박스 종이를 걸어둔 리어카에서 무에 꽂혀있는 옷핀으로 멍게를 달콤한 초장에 찍어 먹었던 것이 처음이다. 싱싱한 멍게는 뭉툭하게 돌출된 꼭지를 칼로 자르면 물이 찍~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데, 돌기로 가득한 붉은 껍질을 벗기면 노란 속살이 반들거리며 분리된다. 접시에 썰어주는 멍게 위에 뿌려준 초장은 어찌나 맛있던지 접시를 깨끗이 비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잘라낸 꼭지 부분은 입에 넣고 조물조물 씹으면 껍질 안에 붙어있던 멍게 조각이 툭 빠져나오며 쫄깃하고 고소한 맛이 난다. 멍게 살은 내게 주시고 딱딱한 꼭지를 드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그리움으로 피어난다.

신선한 바다 향을 듬뿍 머금은 멍게! 수분이 많고 부드러운 섬유질로 이루어져 먹기도 좋고 부담이 없다. 노란 황금빛 멍게를 입에 넣으면 바다향이 입안 가득 퍼지면서 약간 쌉쌀한 맛이 나다가 뒷맛은 은은한 단맛이 있는 실로 묘한 맛이다. 쫄깃하면서도 부들부들한 식감이 독특하다.

멍게는 5월을 중심으로 초여름까지 제철의 맛을 느낄 수 있는 데 이는 다른 철에 비해 글리코겐의 함량이 많기 때문이다. 혈압을 낮추고 당뇨, 피로회복에 좋으며 풍부한 식이섬유가 들어있어 소화개선·장 건강 증진에 좋고 면역력 증진과 노화 방지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특히 멍게를 먹을 때 느껴지는 알싸한 특유의 맛이 알코올의 체내 흡수를 억제시켜 숙취해소에 좋다고 한다. 해삼·해파리와 함께 바다의 ‘3대 저열량 식품’으로 바다의 보물로 불리며 프랑스, 홍콩, 일본 등지에서도 식용으로 사용된다.

이런저런 옛 생각에 잠길 즈음 주문한 멍게비빔밥이 나왔다. 약간 얼린 듯한 네모 모양의 멍게가 따뜻한 밥에 사르르 녹으면서 멍게의 황금빛 육즙에 밥은 순식간에 멍게 향으로 뒤덮였다. 멍게를 비빈 것이 아니라 멍게 향을 덮어쓴 듯한 착각이 후각을 통해 들어오고 씹기도 전에 입속에 향이 넘친다. 거제·통영에서나 맛볼 수 있는 맛의 별천지였다. 멍게비빔밥을 처음 만난 그때의 신선한 맛과 바다향이 이어지는 멍게의 향연, 훌륭한 로컬푸드이다. 누군가 멍게는 향과 쌉쌀한 맛으로 먹는 그 자체로 완성된 해산물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백만석’
‘백만석’

 

이 집이 아직도 거제에 있는 ‘백만석’이다. 십수 년 전에 식당 벽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매년 4~6월에 거제에서 생산되는 살아있는 멍게를 구입, 멍게 속의 뻘을 제거하여 다진 멍게를 약간의 양념과 간으로 버무려 저온에서 반 숙성시킨 다음 먹기 직전에 살짝 얼려 네모꼴로 된 멍게를 썰어 넣고 참기름, 깨소금, 김가루 등을 따끈따끈한 공깃밥과 쓱쓱 비벼 드시는 비빔밥”이라고...

이 식당은 멍게를 잘게 썰어 숙성 후 얼려 납작한 아이스바처럼 썰어낸 멍게 조각은 이 집의 시그니처로, 따뜻한 밥 위에 얹으면 멍게가 샤르르 녹으면서 멍게 즙의 향을 뿜어낸다. 쓱쓱 비벼 한입 베어 물면 싱싱한 바다향이 콧속으로 훅~ 들어와 몸속 가득 퍼져나간다. 참기름, 참깨, 김가루가 싱싱한 멍게 맛과 어울려 고소하다. 멍게의 독특한 조리법으로 맛과 향이 뛰어난 ‘바다 영양 별미’이다. 처음에는 멍게가 4조각(?)이었으나 3조각으로 바뀐 것이 좀 아쉽다.

’충무집‘
’충무집‘

 

을지로에 ’충무집‘이 있다. 회와 도다리 쑥국을 전문으로 하는 집으로 이즈음 선보이는 ‘봄도다리 쑥국과 멍게밥’ 메뉴는 미식가들에게 입소문이 자자하다. 멍게를 잘게 썰어 양념 후 숙성 젓갈을 만들어 밥 위에 얹고 김가루와 함께 비벼 먹는 멍게밥이다. 쑥국의 맑은 국물과 함께 먹으면 고소해서 현지 맛을 느낄 수 있는 멍게젓을 사용한 비빔밥이다. 숟가락으로 아무리 뒤집어 봐도 잘게 썬 멍게 속살과 김, 통깨가 재료의 전부. 평소 흐물흐물한 멍게를 피해온 사람도 한번 먹어볼 만한 메뉴인듯하다. 젓갈을 따로 팔기도 한다.

몇 년 전 통영에서 깐 멍게를 주문하여 싱싱한 생멍게 덮밥을 만들어 먹은 적이 있다. 얼린 양념멍게비빔밥, 젓갈멍게밥이 아닌 생멍게로 비빔밥을 만드니 5월 멍게의 노란 멍게 즙이 밥알을 코팅하여 바다 내음의 멍게 향이 진하고, 쌉싸름한 맛도 기분 좋은 제철 음식이 된다. 아내의 아이디어인 생멍게 덮밥은 멍게의 씹히는 식감도 일품이다. 생멍게는 갖은 야채와 달콤한 초장과 함께 비벼 먹으면 좋고, 제철 멍게는 약간의 소금으로 간하여 냉장고에 두면 숙성되면서 그 향을 오래 간직할 수 있다.

5월이 되면 어머니와 시장을 오가며 먹던 멍게와 초장 맛이 지금도 나에게는 한결같은 마음속의 보물인 것처럼, 거제에서 느꼈던 황홀한 그 맛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나른한 봄철 쌉쌀한 맛의 멍게로 입맛도 찾고 기운도 북돋을 겸, 기분 전환을 위해 맛의 별미 멍게비빔밥을 찾아 나서야겠다. 바다의 풍미 멍게 브라보!

글 손영한 (도로 및 공항 기술사)

 

손영한은 서울이 고향이며, 모나지 않고 정서적으로 순한 서울 맛을 찾아 과거, 현재, 미래를 여행한다. 
35년간 고속도로, 국도를 설계한 도로 및 공항 기술사로 한양대학교 토목공학과 졸업, 한양대학교 산업대학원 석사. 한라대학교, 인덕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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