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옛집 안방 윗목이나 마루 한 켠에는 넓은 천으로 덮여있는 시루가 있었다. 큰 대야 그릇 위에 # 모양의 나무판 위로 시루 항아리가 놓여있었다. “영한아, 시루에 물 좀 줘라” 하시면 천을 벗기고 물을 골고루 부어주었고 그 속에서는 콩나물이 빼곡하게 자라고 있었으며 이쯤 때면 며칠 안에 집안 행사(어른 생신, 제사 등)가 있게구나 하는 신호이기도 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수시로 물을 끼얹어 주고 검은 천으로 빛을 차단하면 수일 만에 콩나물이 수북하게 자란다. 서울에서 자란 나의 6~70년대 우리 집 이야기이며 그때는 집집마다 행사 때 콩나물을 직접 키워 먹었다.

콩나물의 사전적 표현은 ‘햇빛을 비추지 않고 수분만 공급하여 콩(대두)의 싹과 뿌리를 성장시킨 식품’이라고 한다. 주부가 식탁 앞에 앉아 콩나물을 다듬는 장면은 한국 옛 드라마 속 대표적인 모습으로, 요리에 따라 머리 혹은 뿌리를 떼어내는 것을 ‘다듬는다’라고 표현하며 그중 머리와 뿌리를 정성껏 손질해 줄기 부분만 남긴 것을 ‘여의채’라 부른다. 아삭한 줄기와 달리 머리 부분은 단단하여 오독한 전혀 다른 식감이 있어 요리에 선별적으로 사용되며 여의채는 상큼하고 고급스럽게 씹히는 맛을 갖고 있어 특별한 음식의 재료로 쓰인다. ‘요리왕 비룡’의 90년대 애니메이션에서 손질된 콩나물이 손오공의 여의봉을 닮아서 여의채라고 하듯, 콩나물 하나하나 다듬는 일은 어떤 음식에 넣어도 무시 못 할 맛이 있기 때문에 많은 정성을 들여 손질한다. 그깟 콩나물이 아니다...

어머니는 머리와 뿌리를 다듬어 줄기만 있는 콩나물을 당면과 함께 콩나물 잡채, 생선찜·수육 요리, 콩나물밥 등 음식에 사용하셨다. 툇마루에 앉아 신문지 위에 콩나물 대가리가 수북하도록 다듬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련하다. 집에 들어서면 밥 짓는 냄새의 구수하고 달큼한 향은 하얀 쌀밥인지, 콩·팥 밥인지 알 수 있었으며 그 중 어머니의 콩나물밥은 특별하다. 여름철 입맛 없고 별 반찬이 없는 계절에 콩나물밥은 잘 양념된 간장소스, 참기름 만으로 양푼에 비벼 먹으면 아삭한 콩나물의 식감과 따뜻한 쌀밥의 구수함이 어우러져 김치만 있어도 한 그릇 뚝딱! 아~ 콩나물밥...

이런 요리는 콩나물과 밥과의 조화로 콩의 비릿한 냄새를 없애면서 특별한 밥이 된다는 것도 흥미롭다. 집에서 만들어 먹는 우리들 추억의 요리가 아닌가 생각되는 콩나물밥은 따로따로 만들어 섞어먹는 비빔밥이 아니라 밥 지을 때부터 콩나물과 쌀을 켜켜 넣어 밥을 짓는다. 김이 무럭무럭 날 때 잘 섞어 파·깨소금이 들어간 양념간장에 쓱쓱 비벼 먹으면 고소하고 아삭아삭한 식감과 씹는 소리는 자신에게만 들리는 숨소리 같은 소리 음식으로 계절에 먹는 별미치고는 간단하고 즐거운 가정식 요리이다.

한여름의 시원한 콩나물국은 깔끔하면서 개운한 맛 때문에 인기가 높으며 콩나물밥과 같이 곁들이면 좋다. 따뜻하게 해 먹는 것이 기본이지만 냉국으로 만들어 시원함을 즐기기도 하고 김치 등을 넣어서 얼큰하게 만들어지는 콩나물국은 아르기닌이 국물에 우러나와 숙취해소에 좋아 술 먹고 나면 이 국을 먹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이 된지 오래다. 예전에는 콩나물밥하는 식당이 제법 많이 있었고 전주식 요리를 하는 집에서는 으레 콩나물 돌솥밥이 마련되어 있었으나 이제는 재래시장에서나 만날 수 있는 음식이 되어버렸으며 신세대 가정에서는 없어진지 오래다. 식당에서도 콩나물과 밥을 같이 지으면 콩나물 향도 배고 좀 더 푹 무른 식감인데 손님 올 때마다 밥을 지을 수 없는 식당은 밥 따로 콩나물 따로 삶아 올려주니 콩나물밥이라기보다는 비벼 먹는 콩나물비빔밥에 좀 더 가깝다.

'동문식당' 본관
'동문식당' 본관

 

동대문역 근처 ‘동문식당(본점)’에서는 콩나물밥을 참 맛있게 내어 놓는다. 콩나물밥만 하는 전문점으로 밥, 국, 반찬 어느 하나 퀄리티가 절대 뒤지지 않는다. 겉은 허름하지만 점심시간에는 끊이지 않는 손님으로 가성비 좋은 식당으로 이 집의 중요 포인트는 양념간장이다. 파, 마늘, 고춧가루, 통깨, 간장으로 구성된 만능 양념장과 갈은 쇠고기, 김가루의 고명과 함께 썩썩 비벼 먹으면 맛이 없을 수가 없으며 가격도 싸서 그런지 더욱 맛있게 느껴진다. 같이 나오는 배추 된장국은 간단하고 구수하며 직접 담근 무생채와 겉절이 김치는 아주머니의 정성이다. 광장 시장의 마약(?) 김밥과 견줄만한 특별한 음식으로 혜자스럽고 보석 같은 존재의 로컬 맛집이며 옛 을지로의 안성집을 생각나게 하는 육개장은 대파와 쇠고기가 달큼한 게 깔끔하며 가격만큼 맛은 절대로 저렴하지 않다.

‘전통콩나물밥'
‘전통콩나물밥'

 

밥과 콩나물을 같이 지어내는 ‘전통콩나물밥’집이 있다. 출장 중에 발견한 대전 유성에 있는 노포 식당으로 집에서 먹던 콩나물밥과 똑같다. 한 솥에 쌀과 콩나물을 같이 지어 콩나물이 촉촉하고 윤기가 있으며 아삭한 식감이 탁월하고 밥도 비벼 먹기 딱 좋은 꼬들꼬들하지도 질지도 않은 주인장의 노하우가 보인다. 양념장은 서울식의 간장 양념이 아닌 고추장(?) 베이스의 양념장으로 한 스푼 넣어 슥슥 비비면 콩나물과 밥, 양념장의 조합으로 깔끔하고 간결한 맛이 계속 숟가락이 바쁘게 움직이게 된다. 곁드려 나오는 콩나물이 들어간 배추 된장국은 어머니가 해주시던 기억의 맛으로 밥을 말아 먹어도 좋을 듯한 국밥 이상의 정식 메뉴라 하여도 손색이 없다. 열무·배추가 들어간 새콤하고 달짝지근한 나박김치는 국수를 말아먹어도 될 만큼 인기가 좋다. 투박한 식단이지만 제일 그럴듯한 가정식 콩나물밥으로 노포의 정성이 스며있고 맛있는 배추된장국과 나박김치는 다시 찾아가야 할 이유이다.

늦은 오후 햇볕이 길게 드리워지는 툇마루에 앉아 콩나물을 다듬던 아련한 과거의 기억 속에서 만나는 이야기들. 누구나 한 번쯤 지니고 있을 듯한 시간 여행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고 싶다...

글 손영한 (도로 및 공항 기술사)

 

손영한은 서울이 고향이며, 모나지 않고 정서적으로 순한 서울 맛을 찾아 과거, 현재, 미래를 여행한다. 
35년간 고속도로, 국도를 설계한 도로 및 공항 기술사로 한양대학교 토목공학과 졸업, 한양대학교 산업대학원 석사. 한라대학교, 인덕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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