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이 길고 추우며 온통 산악지대인 평안도 일대에서 가장 흔한 작물은 바로 메밀이었고, 이에 따라 늦가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국수를 해먹는 음식문화가 발달하였다. 이것이 칼바람 쌩쌩 몰아치는 한겨울에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야식으로 먹어야 제맛이던 평양냉면이다. 여름에는 메밀을 구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찬 육수를 만들기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옛 문헌에도 “냉면은 겨울 음식으로 평양이 으뜸”이라 하였으며 조선왕조 순조, 고종도 밤중에 냉면을 먹는 기분을 즐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제는 냉장 시설이 발달되면서 냉면이 여름에 즐기는 별미로 자리 잡게 되었다. 날이 더워질수록 생각나는 음식! 추운 겨울에 먹던 맛이 본래 제맛이라지만 무더위를 식혀주는 청량한 맛으로 냉면만 한 것이 없다. 서울에서는 레시피와 문화가 서울식 맛으로 변화된 평양냉면으로 정착하였다.
나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 따라다니면서 함흥냉면의 쫄깃한 식감에 익숙해져 있어서 평양냉면을 즐기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저 시원한 맛에 집 근처 (장충동, 을지로 3가)의 평양냉면 집에서 시작되었으며 처음에는 별 맛을 느끼지 못하면서 지냈으나 차츰 장충동 평양면옥과 을지면옥 냉면 맛이 다르다는 것과 또 식당마다 육수 맛이 조금씩, 때로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점점 을지면옥보다는 평양면옥을 찾는 횟수가 많아졌다. 서울의 평양냉면 부류는 장충동과 의정부 스타일이 있다. 장충동 스타일은 슴슴함을 특징으로 하는 서울식 냉면 중에서도 유독 담백하고, 물처럼 맑고 투명한 육수와 곡향이 많이 느껴지는 면발로 알려져 있으며 대표적으로 평양면옥, 우래옥 등이 있다. 의정부 스타일은 소금기가 느껴지는 간간하고 감칠맛이 있는 육수, 그리고 잘 끊어지는 가느다란 메밀 면발로 고춧가루를 뿌리는 것이 특징으로 을지면옥, 필동면옥 등이 있다. 나중에 내가 평양면옥으로 정착한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다. 지금은 우래옥, 평양면옥, 을지면옥, 필동면옥이 서울 평양냉면의 4대 천왕으로 불리고 있다.
평양냉면의 정의(?)는 ‘동치미를 섞은 고기 국물로 맛을 낸 차가운 메밀국수’이다. 이는 요리 방법을 말하는 것이고 맛에 대한 표현은 어렵다. 그 이유는 시대에 따라 메밀의 함량, 육수의 손맛, 지역과 세대의 차이에 따라 변하는 요리이기 때문에 맛의 기준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차가운 음식이기에 더욱 그렇다. 냉면의 맛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면 무심한 듯 맛이 깊고, 밍밍하면서 또 은근하고, 담담하고 슴슴한 맛, 육수가 맑고 깨끗하고, 뒷맛이 담백하고 개운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듯 평양냉면만큼이나 맛을 함부로 논하기 어려운 음식이 있을까?
독특한 메밀향과 맑고 심심한 육수를 즐길 줄 모르면 ‘냉면 먹을 줄 모른다’고 핀잔을 듣기 일쑤다. 또한 기존 유명한 식당과 조금만 맛이 달라도 맛없다는 핀잔을 듣기 때문에 새로운 식당이 자리 잡기 어렵다. “비빔냉면을 먹는 건 냉면에 대한 배신”이라든가, “겨자와 식초를 치면 맛을 모르는 것”, “면을 가위로 잘라먹는 건 야만적 형태”, “밋밋한 육수를 즐길 줄 알아야 진짜 냉면 맛을 아는 것”이라고 말하는 유명한 식도락가들이 있으나 평양냉면 먹는 법은 겨자든, 식초든, 간장을 듬뿍 넣든, 자기 형편(입맛)대로 즐기면 된다. 규칙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평양냉면 맛의 기준은 ‘각자가 평양냉면의 맛에 첫눈을 떴던 바로 그 식당이 가장 최고의 맛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 식당이 장충동에 있는 ‘평양면옥’이다. 통메밀을 직접 제분하는 식당으로 주문 들어올 때마다 면을 뽑는다. 그래서 메밀 삶은 면수와 면식감이 탁월하다. 노포 식당으로 고기로 낸 투명하고 맑은 육수는 슴슴하고 은은한 육향이 감돌고, 살얼음 없이도 차가운 육수가 독특하고 정말 맑다. 고명으로는 계란 반쪽과 돼지·쇠고기 편육이 있고 오이와 무절임이 있는 게 보기 좋다. 차가운 편육이지만 느끼하지 않고 담백하여 냉면과의 궁합이 좋고 파도 약간 올려져 있어 향을 더한다. 육수 맛이 좋은 걸 보면 제육·편육도 새우젓과 함께 하니 술을 부른다. 첫맛은 육향, 나중에는 메밀향이 스며 있는 육수는 계속 들이키고 싶은 깊은 맛을 가지고 있다.

강남구청 건너편에 순 메밀면 ‘봉피양’이 있다. 이 집이 다른 냉면집과 다른 점은 맑고 맑은 육수에 진한 메밀향이 진수, 특히 육수의 감칠(?) 맛이 그냥 맹물 수준의 맛으로 처음에는 적응하기 어려우나 몇 번 도전으로 나중에는 꼭 리필해서 먹는 마법의 맛이다. 정말 아무 맛없는(?) 깊은 맛에 빠져든다. ‘육수지왕’으로 꼽고 싶은 곳으로 아들하고 손뼉 치며 먹던 기억이 있는 식당이다. 편육과 슴슴한 김치, 배, 계란 지단이 고명으로 놓여 있고 놋쇠 그릇에 담겨 나와 품위가 엿보인다. 면먹기 전에 첫 육수를 꼭 먹어보길 권한다. 입이 깔끔해지고 머리가 상쾌해지는 느낌이 든다. 여기에 곁들이는 돼지갈비는 최상의 고기로 양념과 질이 확실히 달라 냉면과 잘 어울려 식사 내내 즐겁다. 백김치는 여러 번 리필해서 먹는다...
참매미가 “맴-맴-매애 애애 앰~” 울어댄다. 세상이 온통 찜통이다. 질질 비지땀이 흐른다. 그렇다 냉면이다. 세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음식인데 냉면의 기본은 흔들림 없이 이어지고, 푸드러버들이 레시피가 존재하지 않는 평양냉면을 좋아하는 이유는 가게마다 맛이 다 달라서인 것 같다. 아들하고 돼지갈비와 냉면 먹을 날을 기다리며...
글 손영한 (도로 및 공항 기술사)
손영한은 서울이 고향이며, 모나지 않고 정서적으로 순한 서울 맛을 찾아 과거, 현재, 미래를 여행한다.
35년간 고속도로, 국도를 설계한 도로 및 공항 기술사로 한양대학교 토목공학과 졸업, 한양대학교 산업대학원 석사. 한라대학교, 인덕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