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한양대 공대 교수 곽계달 박사
곽계정은 2녀 4남에 장녀로 대구 중심가에서 공예사(공신만물사, 이후 공신공예사로 개칭)를 운영하는 부모아래서 유복한 가정의 장녀로 자라났다. 부모가 잠시, 일제시대 철도청에 근무한 인연으로 어린 시절은 만주에서 생활한 적도 있었지만 해방이후, 홍익대학교 서양학과에 들어가기 전까지 대구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녀가 미술세계에 정식으로 입문하기까지 가장 영향력을 많이 받은 것은 일찍이 아버지가 대구에서 나전칠기 가구공예사 공장을 경영하신 영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일제시대 기예학교(지금의 예술중학교)를 졸업하신 어머니 이소용 여사의 예술에 대한 재능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는 본인이 평소에도 입버릇처럼 자랑스레 말해온 것으로 어머니가 수놓았던 작품을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전시때마다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
그녀의 예술에 대한 창작열이 고조에 달했던 고등학교 시절 미술작업에서 일반 평범한 수채화나 회화를 그리는 중에서도 물감외에 여러 다양한 도구를 이용한 작품을 구상하기를 즐겨했다고 한다.
이후, 그녀가 홍익대학교 서양학과에 진학해서 서양화를 전공하면서 김환기 풍의 서정적 그림을 즐겨 그렸지만 대학원에서는 유강열 판화 공예가의 지도아래 이조 가구 금속장식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던 관계로 그녀의 작품세계는 서양과 동양의 두세계, 서양화와 고가구와 판화라는 다양한 예술영역을 두루 섭렵하게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달항아리로 유명한 추상화가 김환기 화백의 서정성과 국립박물관의 고고학자 최순우 관장의 고고학 사랑, 그리고 새로운 예술기법에 과감하게 실천하는 유강렬 작가의 실험정신, 이 삼위일체가 빚어내는 예술세계가 곽계정만이 실현가능했던 고유의 한국적 디자인인 오리와 개구리로 승화된 동기라 하겠다.
그녀만의 독특한 창작 열정은 학교 교육이나 당대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 부모의 영향과 함께 그녀에게 내재된 자연과 함께 꿈꾸는 동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디자인은 다분히 한국적이면서 고전적이고 또 어린아이의 순수한 정신세계를 나타내는 듯하다. 그렇다고 동심에 집착하는 것은 없다. 대신, 작품에서 어린아이의 단순한 동화보다는 민화에 가까운 그녀만의 묵직한 세월의 깊이와 무게를 느낄수 있고, 보는 이로 하여금 꿈과 자연과 역사의 흔적이 녹아있는 작가의 예술 세계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곽계정이 새로운 장르의 예술세계를 창조하는 마이더스의 손을 가진 한국의 예술인이라 칭함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은 그녀가 새롭게 개척한 덕으로 대한민국의 왕골공예를 비롯한 목공예와 금속장식공예 및 한지공예가 새로운 차원으로 재탄생했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예술인으로서 이룬 업적은 "예술세계의 일상을 일탈하게했고, 또 그 일탈한 세계를 다시 일상화시켜서 자연스레 실생활에 접목시켰다"는 것이다.
친근한 상징으로서의 오리와 개구리, 한국의 산을 배경으로 담배피는 호랑이, 달항아리에서 방아찍는 산토끼, 풀잎의 메뚜기, 한국 고유의 문틀 격자무늬 등의 디자인은 마치 동심을 담은 자연의 꿈과 과거의 추억을 현대예술이라는 무대에 한꺼번에 등장시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한다.
그녀를 한국의 코코샤넬이라 부르는 이유는 오직 한국에서만 소통되는 고유의 창작 디자인이 세계 무대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곽계정 작품 세계의 글로벌화는 이미 일본과 홍콩, 러시아와 구미대륙 세계순회 미술전을 통하여 그녀의 한국적 작품성을 입증하고 인정 받은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선진 동북아 중심시대와 한류의 세계화 시대에 발 맞추어, 한국 고유의 디자인으로 세계를 감동시키는 새로운 창작 작업이 우리에게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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