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일 전 예원예술대 객원교수, ADR(갈등·분쟁해결) 전문가

[중앙이코노미뉴스 문혜원] 연말이면 은행가에 어김없이 "명예퇴직 신청"이라는 공지가 나붙는다. 하지만 이 익숙한 풍경도 머지않아 과거의 일이 될지 모른다. 정부가 '정년 65세 연장'이라는 거대한 화두를 테이블 위에 올렸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 4.5일제 같은 근로시간 단축의 흐름까지 맞물리며, 우리 사회의 고용 시계는 근본적인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다. 이 거대한 전환의 한복판에, '임금피크제'라는 해묵은 숙제가 놓여있다.
한때는 상생의 묘수, 이제는 갈등의 씨앗
2016년 60세 정년이 법제화될 때만 해도 임금피크제는 노사가 상생할 수 있는 묘수처럼 보였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2022년 대법원이 "합리적 이유 없는 임금 삭감은 무효"라는 쐐기를 박은 이후, 관련 소송은 두 배 이상 급증하며 제도는 분쟁의 씨앗이 되어버렸다. 기업들은 소송 대응에 발목이 잡혔다.
은행권의 현실은 더욱 씁쓸하다. 명예퇴직 대신 잔류를 택한 베테랑들은 어느새 조직의 '투명인간'으로 전락한다. 수십 년간 고객과 쌓아 올린 신뢰, 위기의 파고를 넘으며 체득한 노하우는 하루종일 모니터를 바라보며 클릭을 하는 단순 업무 앞에 빛이 바랜다. 은행은 "고임금을 계속 주기는 어렵다"고 항변하지만, 이는 경험이라는 귀한 자산을 단순 비용으로만 계산하는 근시안적 변명일 뿐이다. 은행 스스로 귀한 자산을 창고에 가둬둔 셈이다.
정년 연장과 근로시간 단축이 던지는 질문
정부는 60세 정년 도입 당시의 혼란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세대 갈등 방지, 임금 격차 심화 방지, 소송 남발 방지라는 세 가지 원칙을 내세운 것도 그 때문이다. 특히 "임금 체계 개편은 근로시간 및 직무 조정과 함께 가야 한다"는 대목은 뼈아픈 교훈에서 나온 통찰이다.
이제 임금피크제를 '받고 더 머무는' 단순 거래로만 봐선 안 된다. '더 오래, 그러나 더 효율적으로' 일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받고 있다. 65세까지 일하며 주 4.5일만 출근하는 시대, 고연차 직원의 역할과 기여 방식을 완전히 재정의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처럼 그들을 투명인간으로 방치한다면, 조직은 늘어난 고용 기간만큼 비용 부담과 조직의 무기력이라는 이중고를 떠안게 될 뿐이다.
은행이 먼저 새로운 길을 열어야
이 거대한 변화의 물결 앞에서 은행이 먼저 길을 내야 한다. 위기를 기회로 바꿀 세 가지 구체적인 해법을 제안한다.
첫째, 역할의 재설계가 시급하다.
많은 은행이 퇴직을 유도하기 위해 재취업 프로그램에만 힘을 쏟는다. 정작 직원들이 왜 떠나지 않고 남으려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부족하다. 이제는 삭감된 임금과 줄어든 근로시간에 걸맞게, 그들의 경험이 빛을 발할 새 직무를 만들어야 한다. 신입 행원의 성장을 돕는 ‘전담 멘토’, 고액자산가의 신뢰를 얻는 ‘VIP 자산 컨설턴트’, 금융사고를 예방하는 ‘내부통제 전문가’ 등은 베테랑만이 해낼 수 있는 영역이다. 이것이야말로 정부가 강조한 ‘합리적 직무 조정’의 가장 현실적인 해답이다.
둘째, 평가와 근무 방식을 유연하게 바꿔야 한다.
과거의 획일적인 성과 평가는 더는 유효하지 않다. 멘토링 성과, 고객 만족도, 조직문화 기여도 같은 정성적 가치를 평가에 반영해야 한다. 또한 근로시간 단축 흐름에 발맞춰 고연차 직원에게 선택적·단축 근무제를 시범 적용해볼 수 있다. 풀타임 대신 특정 프로젝트나 자문 역할을 맡긴다면, 조직의 생산성과 개인의 ‘워라밸’을 함께 잡는 윈윈(win-win) 전략이 될 것이다.
셋째,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연대'가 필요하다.
임금피크는 더 이상 소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머지않아 우리 모두가 마주할 미래다. 이제 고참 직원들이 수동적으로 버티는 ‘존버’의 시대를 끝내고, 스스로의 역할과 권익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 후배 세대와 함께 지속가능한 고용 모델을 그리는 세대간의 소통과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조직이 필요하다.
65세 정년은 피할 수 없는 파도다. 지금 은행이 ‘투명인간’을 조직의 '숨은 자산'으로 재발견하고 그들의 가치를 재설계할 때, 비로소 세대 갈등과 법적 분쟁의 파고를 넘어 지속가능한 성장의 돛을 올릴 수 있다. 이제는 임금피크 직원들이 스스로 움직이고, 또 당당히 요구할 시간이다.
